1. 행장(行狀)

반야바라밀다결사 보현도량 法主와 도솔산 도피안사 개산연기문
門人至元泣撰

선사(先師), 금하당 광덕대선사(金河堂光德大禪師)께서는 1927년 4월 4일 경기도 화성(京畿道華城), 제주 고씨(高氏) 가문의 둘째 아들로 출생(出生)하셨다.
선사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강기(强記)와 총명한 예지(叡智)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천성(天性)은 보살(菩薩)의 흉회(胸懷)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자비(慈悲)의 용색(容色)과 언행(言行)의 활보(闊步)는 자못 주위의 이목을 한 몸에 끌었다.
그렇지만 선사 유소년시절(幼少年時節)은 불행하게도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미개무도(未開無道)가 세계 도처에 험한 물결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만방(萬邦)의 민생(民生)은 불안(不安)과 공포(恐怖)에 떨어야 했고,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이 강토(疆土)도 일제(日帝)의 잔혹한 강점(强占)과 무자비한 침탈(侵奪)로 말미암아 문화의 단절(斷絶)과 정신의 침체(沈滯)를 겪어야 했다.
급기야 이 땅의 민생들은 남부여대(男負女戴)의 기나긴 행열을 이루어 청구(靑丘)의 정든 고향을 등지고 춥고 황량한 이역(異域)을 유리(遊離)하며 풍찬노숙(風餐露宿)하는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조국 강산에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속에서 민초의 삶은 암담했고 하루 하루의 생활은 고단하기만 시절.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과 이 강토 구석구석에 뻗친 일제(日帝)의 검은 마수, 그로 인한 절망과 비탄 어린 질곡(桎梏), 마치 해일처럼 몰아쳐 오는 엄청난 대재앙을 감당하거나 피할 수 없었던 선사의 유소년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어찌 선사 홀로 겪은 아픔과 괴로움이었겠는가!
아, 선사가 태어나자마자 불가항력으로 겪어야 했던 그 가혹한 수난은 분명 유소년의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는 미처 감당하기 어려웠던 큰일이었기에 한 점 그늘 없이 자라야 할 성장기를 시대의 불운과 민족의 비애를 짊어지고 아프게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이미 과거 생부터 정해진 피치 못할 선사의 숙업(宿業)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시대 우리 민족과 인류가 짊어져야 하는 공업(共業)이라고 해야할까,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이와 같이 선사의 유소년기는 국권상실(國權喪失)로 말미암은 좌절과 절망의 암울했던 비탄의 시기였고, 그로 인해 한창 성장기를 맞이한, 정예(精銳)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선사는 성장과 더불어 아픔과 고뇌도 차츰 깊어갔다. 또 그것은 자연스레 민족의식으로 싹터갔고 인간에 대한 자각〔本性自覺〕과 사회정의(社會正義)와 나라의 독립(祖國獨立)에 대한 열정으로 커가고 변모해갔다. 선사의 수특(秀特)한 성정과 남다른 추구정신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현실적인 좌절과 절망은 오히려 내면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마치 ‘고난 속에서 인간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을 증명함이런가?

선사는 이처럼 현실적인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이 처한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미처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시절부터 도서관에서 밤을 꼬박 새워 동서고금의 여러 전적을 섭렵했고, 또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느라 더위와 추위를 불각(不覺)했으며, 잠을 줄이고 시간을 아껴서 보다 근원적인 내면을 순수히 지향해 갔던 것이다.
조국 독립에 대한 고뇌와 인간 내면에 대한 열정적이고 진지한 탐구는 선사를 빠른 속도로 변모〔早熟〕시켰으니, 그것은 선사가 평소 가졌던 치열한 문제의식 때문이었으리라. 즉 조국의 독립, 인간의 존엄, 세계평화에 대한 열망과 만인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드높은 관심이 선사를 온통 사로잡았고, 또 불철주야 책에 매달려 부단히 정진하게 했던 동인이었음을 본다. 훗날 구국구세(救國救世)의 각(覺) 운동을 통해 어린시절부터 추구했던 그 일을 구체적으로 빠르게 실현해 간 것을 보면 그 당시 선사가 걸었던 길은 이미 하나의 예정된 과정(過去生의 誓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선사의 청소년기, 정신적인 행각(行脚)에 대한 세간의 첫 만남은 철학자 박종홍선생이었고, 출세간의 첫 만남은 당시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 주지였던 소천법사와의 해후였다. 세간, 출세간이라는 이름의 구분을 떠나서 두 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선사께 하나의 예정된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으니, 이것을 단지 당대 석학과 법사의 놀라운 안목의 일치라고만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
그 때 선사는 이미 몸에 큰 병이 들어 있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의 참된 길, 만인이 염원하는 진정한 자유와 세계평화, 오직 그 길을 찾아서 푸른 눈길을 만고불변한 진리의 세계로 던졌던 것이다. 후인은 선사의 이 결행을 뭐라고 말할까? 의당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선사가 가는 길에 두 분의 권유와 인도는 지남(指南)이 되었을 테고, 숙세의 서원이 세간을 떠나는 용기〔動因〕가 되었을 것이다.
선사는 주변의 이러한 배려〔時節因緣의 成熟〕와 자신의 선근(善根)으로 옛 인연의 길을 쫓아 남행〔古路南行〕을 결행하였던 것이니, 때는1950년 가을이었다. 선사는 국군(國軍)이 북진(北進)하는 동족전장(同族戰場)의 함성과 대포소리를 뒤로하고 보살군(菩薩軍)이 생노병사와 쟁투하는 일대사전장(一大事戰場)을 찾아 남진(南進)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동산대종사(東山大宗師)에게 수계하기까지는 무려 10년 세월, 강산도 변한다는 오랜 세월 속에서 선사는 한번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오직 처사(處士, 行者)의 신분을 자원(自願), 백천(百千)의 온갖 고행(苦行)을 감행했다. 이는 실로 구세대비의 원력보살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간절히 무상도(無上道)를 닦아 나간 옛일과 같다하겠다.
바야흐르 선사는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아야할 때가 왔음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이에 대사일번(大死一番)의 호법서원(護法誓願)과 출격장부(出格丈夫)의 산도 비켜서고 강물도 거꾸로 흐를 대신심(大信心)을 일으켜 드디어 출가득도(出家得度)의 길로 들어섰다. 때는 1960년 봄, 절기는 호시절 만물이 약동할 때였다.

출가의 신성과 존엄을 숭상하여 그토록 오랜 세월 공을 들여 대비의 원(願)을 키웠던 선사, 드디어 대사일번의 출가로 성제자(聖弟子)가 되었으니 선사의 출가야말로 하늘 꽃이 핀 것이라고 하겠다. 그로부터 선사의 활발발〔奮心〕한 구도심(求道心)은 더욱 큰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되었고, 일세(一世)의 신심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보살헌신(菩薩獻身)이 되어 간난(艱難)에 처한 종단과 종립 동국학원(東國學園)을 구해내었으니〔扶宗救校〕, 이는 실로 대한불교 청백가풍(淸白家風)의 유구한 수행 전통을 되살린 오늘의 위업(偉業, 統合宗?)에 튼튼한 초석을 놓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선사의 열렬한 구도심과 뜨거운 대비심은 그 어디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언제나 제불(諸佛)께 길을 물었고 어디서나 조종(祖宗)의 뜻을 살폈다. 그러기에 부종구교의 종단소임을 원만한 뒤, 의당 새로운 불사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즉, 불광회(佛光會)를 창립(1974년9월1일)하여 부처님의 각(覺)을 통해 구국구세(救國救世)의 세기적 불사(佛事)를 과감하게 열어나간 것이다. 부처님의 각(覺, 般若波羅蜜多), 행(行, 普賢行願)의 원만(圓滿)을 근본으로 하고 선사의 고준(孤峻)한 혜안(慧眼)의 한마음헌장(憲章)과 보현행자(普賢行者)의 서원(誓願)으로 당대의 묘방편(妙方便)을 삼았으니, 이는 곧 대한민국 시대에 새로 등장한 대승불교운동의 또 다른 이름인 반야바라밀다결사(般若波羅蜜多結社)이고, 정법호지발원(正法護持發願)과 법등(法燈)의 점등운동〔傳法〕이다.
대성(大聖)께서 인천(人天)에 드리운 자비의 그물 망〔慈悲之網〕을 작은 고기 한 마리도 지나지 못하듯이, 선사의 대원대행(大願大行)의 보현도(普賢道)는 단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 명백하여 새물줄기로 그 기세를 불연지지(佛緣之地) 청구(靑丘)에 드러냈음이라. 이는 참으로 불조(佛祖)의 뜻을 오늘에 이은 인천의 안목(人天之眼目)이며,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중생성숙, 국토성취의 광작불사(廣作佛事)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불교 조종(祖宗)이 면면히 이은 심인(心印)을 보화응동(普化應同)으로 이 시대에 다시 꽃피우고 열매 맺은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참 면모가 아닐런가.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장거로 말미암아 불광이 한국불교의 새 물줄기로 자임(自任)하게 되었던 것이며, 순수불교 선언〔一名, 般若波羅蜜多結社文〕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인 불광운동(般若波羅蜜多結社-佛光運動)의 거보(巨步)를 내딛게 된 것이다.

또한 선사께서는 불초(不肖)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 도솔산 연화부수(蓮花浮水)의 터전에 도피안사(兜率山到彼岸寺)의 부지를 매입하자, 즉시 개산(開山, 1992년7월6일)을 허락하시고, 이어 삼 년을 주석(住錫)하였고, 추가로 인근 부지 매입을 지시하여 선사가 제창한 한국불교 새 물줄기의 본거지가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 기초를 하나하나 형성하도록 했다.
그러한 선사의 대비서원이 서린 이곳 도피안사는 올해로 개산 10주년을 맞게 되었다. 비록 강산이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그동안 선사의 유촉을 받들었다고 자부할만한 일은 아직 하나도 없으니 참으로 송구함을 금할 길 없고, 애석한 마음 감출 곳도 없다.
삼가 고개를 숙여 다시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마땅히 해야 될 일임에도 못한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만 거듭 통감(痛感)할 뿐이다. 그러나 때에 이르러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위해 먼저 선사께 참회하고, 이제부터라도 다시 용맹정진(勇猛精進)?불석신명(不惜身命)으로 선사의 유촉을 이어갈 것을 재삼 결의한다.

생각해보건대 진리를 법(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우주 만유의 근본법칙(法則)이기 때문이다. 그 법칙은 선사께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 선사의 육신이 온 것처럼 가야할 때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구세대비 원력보살’이라고 이 땅의 무수한 보살군(菩薩軍)들로부터 아낌없이 칭송 받았던 선사께서도 해야할 일들이 많이 남았지만 자신의 세간 인연이 이미 다 했음을 스스로 알고 당일 아침 일찍 불초에게 길 떠날 소식을 미리 전했다.
그러나 둔한 근기(鈍機)는 미적거리다가 그만 때를 넘겨 불효의 대죄를 짓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고구정녕의 특별한 부촉만 남기신 채 1999년 2월 27일 오후 2시 무렵, 세수 73세로 모든 교화(敎化)의 인연을 조용히 접으시고 입반야무상삼매(入般若無相三昧)로 화귀본공(化歸本空) 하셨다.
이제 선사 입적 삼 년을 당하여 다시 가슴을 여미고 생전에 보여주신 구세대비의 일대사 교화인연을 돌아보니 선사께서는 이미 과거 생에 큰 서원을 세우고 이 땅에 오신 하생보살(下生菩薩)이라는 생각이 새삼 간절하다. 그 까닭은 불초의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니라 선사의 법통(法統)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선사는 일제 암흑기의 횃불이셨던 용성조사(龍城祖師)의 문손(門孫)으로, 중흥조도(重興祖道)의 전범(典範)이신 동산대종사(東山大宗師)의 문인(門人)으로,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金剛經讀誦救國願力隊)를 주도하신 소천노선사(昭天老禪師)의 법사(法嗣)로, 그 뛰어난 가풍을 모두 이어서 마침내 한국불교의 새 물줄기인 불광운동〔般若?行願의 圓融佛敎〕을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사 생평, 그 가난한 육신을 보살의 행원력으로 꿋꿋하게 이기고 광대한 서원과 무수한 묘방편으로 불광을 세워 구국구세, 각(覺)운동을 통해 우리 겨레와 인류에게 전쟁 없는 세계 평화의 원리와 길을 밝혀주었다.
이것이 구세문중(救世門中)의 내력이고 전등(傳燈)의 보리도(菩提道)이다. 그러므로 선사께서는 용성조사에게 캄캄한 밤중에 환히 비치는 횃불의 뜻을 얻었으며, 동산노사로부터는 공문(空門, 佛敎)의 표준을 얻었고, 소천노사에게는 도세제중(度世濟衆)의 방략(方略)과 구국구세에 상응(相應)하였다. 또한 사형(師兄), 성철종정(性徹宗正)께는 동문지음(同門知音)으로 공문의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에 즉문즉답(卽問卽答)의 전거를 수수(授受)했고, 역경(譯經) 서문을 통해 천하에 보살대도의 큰 뜻을 함께 천명했다. 또 돈독한 불심상교(佛心相交)로 구세원력과 해행(解行)을 온전히 하여 해탈정로(解脫正路)를 만세에 표방하였으니, 이를 통해 ‘아, 가히 비단 장막 위에 꽃을 뿌림과 같다’ 고 말한 고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고 해야할지.

이에 불초(不肖)는 先師께서 천화(遷化)의 법문을 보이신 지 삼 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그 고준독보(孤峻獨步)한 뜻을 선양하고자 제방의 대덕명현(大德明賢)을 청하여 법사(法嗣)의 일(佛事)에 증명이 되어 주십사 이렇게 간망(懇望)한다.
워낙 간략으로 쓰기도 했지만 아직도 선사 자용(慈蓉)이 역력하여 자꾸만 정회(情懷)가 솟아올라 줄거리를 놓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만 선사의 행장(略狀)에 결누(缺漏)가 더 많게 된 점,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아아, 더욱 죄스럽고 부끄럽기만 하다.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대선사(大禪師) 귀공(歸空) 3년을 당하여
불기 254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도솔산 도피안사 묘향대에서 焚香敬書

- 광덕스님 시봉일기 별권 ‘환생’ 18쪽에 실린 글임 -